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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화의 작품세계는 미美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과연 어디서,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 라는 매우 포괄적인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과거, 미의 개념은 ‘도덕적’ 아름다움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과 순수한 미학적 의미에서 미적 경험을 일으키는 ‘정신적’ 내용, 그리고 가장 좁은 의미의 아름다움으로서 형태와 색을 통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 가장 좁은 의미의 ‘시각적’ 아름다움이 현대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미의 개념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우리의 삶 속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는 점차 표면적인 것만을 중시하게 되었다. 매스미디어가 생산해내는 미의 척도는 실상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기 보다는 현실의 파편들을 일정한 패턴으로 편집, 구성함으로써 특수한 의미, 유행을 만들어낸다. 때문에 보통의 여성들이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육체의 실체는 본래 그대로의 실제가 아니라 매스미디어에 의해 매개되고 조작된 실제인 것이다. 이렇듯 조작된 현실의 이미지는 개별적인 자아의 특성 및 개성을 망각시키고 허위를 현실로 지각한 채 너도 나도 그것을 따르고 좇게 만든다. 현대 사회의 경제산업구조는 인간의 신체에 대해 끝없는 결핍과 변화를 유발시킴으로써, 이를 따르지 않으면 마치 존재감마저 박탈당할 것 같은 불안감을 조성시키도록 교묘히 순환되고 있다. 또렷하고 큰 눈과 주름 없는 피부, 탄력 있는 목선, 도톰한 입매와 브이라인의 턱을 만들기 위한 여성의 노력은 결국 남성중심의 역사와 끊임없이 신체를 대상화하는 매스미디어와 자본의 결탁에 의한 치밀한 계획과 그 결과에 다름 없는 것이다. 홍일화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렇듯 뚜렷한 개성을 상실한 채 미디어에 투영되는 편집된 이미지의 표면적인 아름다움에 취해, 성형 강박과 스타지향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심리적 불안감과 미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을 특별히 여성의 신체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증명사진과 패션사진 등의 형식을 빌어 캔버스 위에 거대한 얼굴과 신체를 담는 그의 작품은 선택적으로 비대해진 이목구비와 지나치게 과장된 메이크업, 리얼하게 주름진 피부를 무색하게 만드는 새하얀 이와 번쩍이는 선글라스, 탄력 있는 머리칼 등을 풍부한 색감을 통해 매우 섬세하고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 가운데 흥미를 일으키는 한 요소는 16세기에 매우 독특한 화풍의 초상들을 남긴 화가 주세페 아르킴볼도를 떠올리게 하는 알레고리적 표현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까지 정서적 충격과 미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아르킴볼도의 초상은 꽃과 과일, 야채, 물고기 등 다양한 사물을 인물의 표정과 형태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얼굴 표면의 뒤편에 감추어 있음직한 원초적인 본성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홍일화의 작품 역시 화려한 신체의 표현 뒤에 감추어진 현대인의 허망한 욕망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풍유적 기법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희원 박미라 개인전 - 개인사 수집_Being Flaneur 전에 초대합니다! ![]() 박미라 개인전 개인사 수집展 - Being Flaneur 2008. 1. 23 – 2. 5
박미라 작업노트 중
![]() 박미라, 개인사 수집전, 2008 자신의 특성 중 하나인 ‘게으름’이라는 요소를 오히려 하나의 운동이라 명명하고,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 칭하며, 이러한 ‘게으름 운동’을 일상 속의 작은 에피소드들을 통해 느리지만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담아낸 영상 작품을 선보였던 박미라가 대안공간 미끌에서의 첫 개인전을 통해 Flaneur플라네(프:별다른 의식 없이 거니는 행위)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우리는 플라네를 1950년대 프랑스에서 새롭게 등장한 소설형식인 누보로망과 관련 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특정한 줄거리나 뚜렷한 인물 설정, 윤리나 사상성의 통일 없이 자유로운 시점에서 세계를 묘사하는 특징으로 잘 알려진 누보로망은 전통적인 것, 관습적인 것에 반기하는 실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가와 철학가들은 정신적 공허와 피폐에 따른 욕구, 새로운 윤리, 새로운 철학, 새로운 가치의 갈증을 겪게 되고, 이에 따라 새로운 방식의 시선과 삶의 태도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뚜렷한 목적 없이 거리를 활보하며 군중이 쉽게 보지 못하며 찾지 못하는 작고 사소한 것들을 탐정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며 자신만의 도시체험 방식을 그려나가는 박미라의 활동은 결국 거대하고 거대한 도시 속에서 작디 작은 개인의 삶을 어떻게 하여 소중히 바라보고 가꾸어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게으름과 산보라는 코드가 다른 듯 닮아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게으름에 대한 그의 찬양과 플라네 활동은 단순히 쉬기 위해 잠을 자고, 방안에 갇혀 뒹굴 거리는 것, 혹은 단지 건강을 목표로 걷기 운동을 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박미라는 자신의 논문 『내 작업에 산책자 끌어들이기』에서 “나는 게으름을 나태하고 멍청하고 능력 없는 소수의 타자로 보지 않는다. 능력주의와 자본주의의 희생자가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고 기존의 흐름을 저항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바라본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었던 게으름 운동을 지나 이제 ‘새로운 눈을 가지고’ 도시를 산보하는 플라네의 즐거움에 몰두한 박미라의 작품들이 한층 활기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행의 증거는 디지털 카메라의 메모리에 담겨있을지 모르나, 여행을 통해 얻은 즐거움과 성숙된 삶의 태도는 카메라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에 체득되고 각인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통장의 잔고나, 명함의 직위 보다는 어쩌면 스쳐간 추억, 우연한 만남을 비롯한 매일 매일의 작고 작은 에피소드들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박미라의 플라네가 발견한 수집물들이 언뜻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것이 바로 삶의 생생한 기록이자 역사의 증거임을 우리는 감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유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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